조제프 푸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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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제프 푸셰는 1759년에 태어나 1820년에 사망한 프랑스 정치가로, 프랑스 혁명, 나폴레옹 시대, 그리고 그 이후 시기에 걸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오라토리오회에서 교육을 받았고, 프랑스 혁명 시기에는 국민 공회 의원으로 활동하며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했다. 혁명 과정에서 공포 정치를 주도하며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나폴레옹 시대에는 경찰 장관으로 정보를 독점하며 권력을 강화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에 참여하여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다. 이후 나폴레옹과의 갈등으로 해임되기도 했지만, 나폴레옹 몰락 후에는 다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푸셰는 정보 정치와 변신술에 능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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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프 푸셰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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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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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일 | 1759년 5월 21일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르 펠르랭 |
사망일 | 1820년 12월 26일 |
사망지 | 오스트리아 제국, 트리에스테 (현재 이탈리아) |
국적 | 프랑스 |
서명 | Signatur Joseph Fouché.PNG |
정치 경력 | |
정당 | 자코뱅 (1789–1795) 지롱드 (1792–1793) 몽타뉴파 (1793–1794) 테르미도르파 (1794–1799) 보나파르트주의 (1799–1814) |
관직 | |
집행위원회 의장 | monarch: 나폴레옹 2세 임기 시작: 1815년 6월 22일 임기 종료: 1815년 7월 7일 전임: 직책 신설 후임: 직책 폐지 (탈레랑 총리) |
경찰 장관 | 1기 임기 시작: 1799년 7월 20일 1기 임기 종료: 1810년 6월 3일 1기 전임: 클로드 세바스티앵 부르기뇽-뒤몰라르 1기 후임: 안 장 마리 르네 사바리 2기 임기 시작: 1815년 3월 20일 2기 임기 종료: 1815년 6월 22일 2기 전임: 쥘 앙글레스 2기 후임: 장, 콩트 펠레 드 라 로제르 3기 임기 시작: 1815년 7월 7일 3기 임기 종료: 1815년 9월 26일 3기 전임: 장, 콩트 펠레 드 라 로제르 3기 후임: 엘리, 뒤크 데카즈 |
국민 공회 의원 | 선거구: 낭트 임기 시작: 1792년 9월 20일 임기 종료: 1795년 11월 2일 |
기타 정보 | |
칭호 | 오트랑토 공작 (1808년) |
2. 생애
조제프 푸셰는 1759년 5월 30일 낭트 근처 르 펠르랭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쥘리앵 조제프 푸셰(1719–1771)는 뱃사람이자 상인이었고, 어머니는 마리 프랑수아즈 크루아제(1720–1793)였다.[1] 푸셰는 오라토리오회 수도원에서 교육받았으며, 문학과 과학에 재능을 보였다. 스무 살에 수도원 학교 교사가 되어 물리와 수학을 가르쳤다.[1]
아라스에서 수도원 교사로 일하던 중, '로자티'라는 사교 클럽에서 로베스피에르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그의 여동생 샤를로트와 약혼했다.[1]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자 푸셰는 수도복을 벗고 혁명에 투신했다. 1790년 오라토리오회는 혁명적 원칙을 옹호하는 푸셰를 통제하려 낭트 대학으로 전출시켰으나, 그는 더욱 민주주의자가 되었고, 반성직주의적 태도로 자코뱅 클럽을 비롯한 낭트 시민들에게 호감을 얻었다. 1792년 5월 오라토리오회 대학이 해산되자 푸셰는 수도회를 떠났다.[1]
2. 1. 프랑스 혁명 시기
프랑스 혁명 당시 푸셰는 고향 낭트에서 새로 문을 연 혁명클럽 '헌법의 벗 협회' (자코뱅 클럽 지부)에 들어가 곧 그곳의 대표자가 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온건한 행보로 시민들의 신용을 얻었다.프랑스 혁명이 성공하고 루이 16세를 몰아낸 후, 푸셰는 고향 낭트에서 국민공회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해 당선되었다. 당시 옛 친구 로베스피에르는 산악파(자코뱅파)로 의사당 좌파에, 푸셰는 지롱드파로 오른쪽에 앉았다. 1793년 1월 16일 저녁, 국민공회에서는 루이 16세의 구명과 사형을 두고 격론이 벌어졌다. 로베스피에르는 단호하게 사형을 주장했고, 양측 표는 팽팽하게 엇갈렸다. 낭트 선거구민의 온건한 견해를 고려하면 푸셰는 왕의 구명에 투표해야 했으나, 연단에서 국왕의 사형에 투표했다. 투표 결과는 387대 334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왕립 튀일리 궁전 습격 이후, 1792년 9월 22일 국민 공회는 프랑스 제1 공화국을 선포했고, 푸셰는 로르-앵페리에르 데파르트망을 대표하는 국민 공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푸셰는 콩도르세 후작과 지롱드당에 접촉하며 지롱드당원이 되었다. 그러나 루이 16세의 재판과 처형에 대한 지지 부족으로 인해, 혁명적 교리를 더욱 결정적으로 지지하는 자코뱅에 합류하게 되었다. 푸셰는 왕의 즉각적인 처형을 강력히 지지하며 "왕의 그림자 앞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을 비난했다.
2. 2. 리옹의 도살자
루이 16세의 처형 이후, 지롱드파가 몰락하면서 푸셰는 급진파인 자코뱅파로 전향했다. 그는 파견의원으로 선출되어 자신의 선거구인 낭트를 비롯해 느베르, 물랭 등지에서 반혁명 세력을 진압하고, 부자들을 억압하며 교회를 약탈해 악명을 얻었다. 리옹에서 대규모 반란(리옹 반란)이 일어나자, 공안위원회는 조르주 쿠통을 파견해 진압을 시도했다. 국민공회는 리옹의 완전한 파괴를 명령했으나, 쿠통은 형식적으로 집 몇 채의 지붕을 부수는 데 그쳤다.[31]국민공회는 쿠통 대신 푸셰를 파견했다. 푸셰는 리옹 훈령을 발표하고, 두 달 넘게 수십 명을 한 덩어리로 묶어 대포로 쏘아 처형하는 등 잔혹한 방식으로 반란을 진압했다. 또한 리옹의 문화재를 폭파하는 등 도시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3개월 동안 2000여 명을 학살한 이 사건으로 푸셰는 '리옹의 도살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31]
2. 3. 테르미도르 반동
로베스피에르는 리옹에서 푸셰가 저지른 잔혹 행위에 경악했고,[10] 1794년 6월 초에는 최고 존재 축제에서 푸셰가 유신론적 부흥을 조롱하는 것에 분노했다. 1794년 7월 14일, 로베스피에르는 푸셰를 자코뱅 클럽에서 추방하려 했다.[8]푸셰는 파리에 숨어 지내면서 로베스피에르를 타도할 음모를 꾸몄다. 그는 남은 극좌파 (콜로 데르부아, 빌로바렌) 및 온건파 (부르동 드 루아즈, 프레론)와 연합했고, 국민 공회 내 평원파의 지지를 얻어 로베스피에르에 대항했다.
결국 1794년 7월 28일, 테르미도르 반동이 일어나 로베스피에르는 실각했다. 푸셰는 반동을 주도하며 "그[로베스피에르]가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내일 죽을 것이오"라고 의원들을 설득했다고 전해진다.[8] 푸셰는 회고록에서 로베스피에르에게 자신의 혐의를 입증하라고 요구했고, 위협받는 동료들과 은밀히 규합했다고 밝혔다.[8]
2. 4. 총재정부 시기
총재정부 (1795–1799) 시기, 푸셰는 처음에는 잊혀졌지만, 한때 피에르 가스파르 쇼메트가 이끌었고 현재는 프랑수아-노엘 바뵈프가 이끄는 극좌와의 관계를 통해 다시 권력에 접근했다. 그는 1796년 바뵈프의 음모를 총재 폴 프랑수아 장 니콜라 드 바라스에게 밀고했다고 알려져 있다.[12] 그러나 이후 연구는 이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12]1797년, 푸셰는 군사 물자 관련 직위를 얻어 재정적으로 성공할 기회를 잡았다. 처음에는 왕당파에게 협력했으나, 이후 자코뱅과 바라스에게 다시 접근했다. 프뤽티도르 쿠데타에서 바라스에게 협력한 대가로, 1798년 치스알피나 공화국 주재 프랑스 대사로 임명되었다. 비록 밀라노에서 오만하다는 평가를 받아 해임되었지만, 푸셰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후임자를 상대로 음모를 꾸몄다.[12]
1799년 초, 파리로 돌아온 푸셰는 헤이그에서 잠시 대사로 근무한 후, 1799년 7월 20일 파리의 경찰 장관이 되었다. 새로 선출된 총재 엠마뉘엘-조제프 시에예스는 자코뱅의 과격한 행동을 억제하려 했고, 푸셰는 대담하게 자코뱅 클럽을 폐쇄하고 정부 비판자들을 색출했다.[12] 이집트 원정에서 나폴레옹 1세가 돌아올 무렵(1799년 10월), 푸셰는 프랑스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이 되었다.[12]
3. 나폴레옹 시대
나폴레옹 1세 시대에 푸셰는 경찰 장관으로서 정보를 장악하고 권력의 제2인자로 군림했다.[11] 총재정부의 인기가 없음을 인지한 푸셰는 시에예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함께 정부 전복 음모에 가담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적극 추진하여 보나파르트의 호의를 얻었다.[11]
프랑스 통령 정부에서 푸셰는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고, 파리와 지방 경찰의 중앙 집권화와 효율성을 높였다.[11] 그는 왕당파의 감사까지 받으며 나폴레옹의 임의적인 행동을 완화시키기도 했다. 단검 음모에서 주요 "음모자"들은 쉽게 함정에 빠졌고, 생니케즈 거리 음모는 왕당파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나폴레옹의 자코뱅 탄압은 막지 못했다. 푸셰는 자코뱅을 통령 정부의 복수에서 구한 것으로 여겨졌고, 보나파르트는 권력이 커진 푸셰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802년 8월 1일, 종신 제1통령으로 선포된 보나파르트는 푸셰를 해임하고 경찰 부서를 폐지, 업무를 법무부로 이관했다. 그러나 푸셰에게 원로원 의원직과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1802년 이후 푸셰는 프리메이슨으로 돌아가 제국 전역의 프리메이슨 정보를 얻었다.[12] 원로원 의원이 된 그는 경찰 예비 자금 절반을 차지하고 음모를 꾸몄다. 조르주 카두달-샤를 피슈그뤼 음모 당시 나폴레옹의 호의를 얻고, 앵기앵 공작 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푸셰는 앵기앵 처형에 대해 "범죄보다 더 나쁜 실수였다"고 말했다.[13]
제1 프랑스 제국 선포 후, 푸셰는 다시 경찰부 수장(1804년 7월)과 내무부 장관을 맡아 중요 활동을 했다. 그의 경찰은 어디에나 있었고, 나폴레옹과 푸셰가 불러일으킨 공포는 1804년 이후 음모 부재의 이유 중 일부였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이후, 푸셰는 "폐하, 아우스터리츠는 구 귀족을 붕괴시켰습니다. 생제르맹 교외는 더 이상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푸셰를 불신했다. 1808년 초 스페인 원정 중 푸셰와 탈레랑의 회동, 조아생 뮈라 접촉 소식을 듣고 파리로 돌아왔으나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해 푸셰는 오트란토 공작 칭호를 받았다.
1809년 오스트리아 원정 중 영국의 왈체렌 원정이 앤트워프를 위협하자 푸셰는 6만 국민 방위군 동원 명령을 내렸다. 황제는 불만을 표했지만, 조치는 승인했다.
이후 황제와 장관 간 마찰이 발생했다. 1809년 말 푸셰는 스펜서 퍼시벌 영국 내각에 비밀 접근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알고 1810년 6월 3일 푸셰를 해임하고 로마 총독직을 주었다. 푸셰는 중요 문서를 넘기지 않아 황제를 분노케 했고, 피렌체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다 토스카나 엘리사 보나파르트 중재로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14] 1812년 러시아 침공을 막으려다 실패한 푸셰는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음모 연루 의심을 받았다.
결백을 입증하고 조언한 푸셰를 황제는 일리리아 지방 통치로 보냈다. 독일의 나폴레옹 체제 붕괴(1813년 10월) 후, 조아생 뮈라 감시를 위해 로마, 나폴리로 파견되었다. 뮈라의 로마 침공으로 귀국 명령을 받은 푸셰는 나폴레옹 퇴위 시점인 1814년 4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
푸셰는 원로원 의원으로 샤를 10세 형제 아르투아 백작 샤를에게 대표단을 보내 군주제와 국가 간 화해를 모색하도록 조언했다. 엘바 섬의 나폴레옹에게 미국 철수를 간청하고, 루이 18세에게 자유 옹호, 이익 화해 조치 채택을 권고했다.
루이 18세 반응이 불만족스럽자, 푸셰는 부르봉 왕가 전복 음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라파예트 후작, 루이 니콜라 다부가 연루되었지만, 푸셰 등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아 무산되었다.
3. 1. 권력 장악과 정보 정치
나폴레옹 1세 시절, 경찰장관으로서 정보를 장악하여 권력의 제2인자로 군림했던 푸셰는 시에예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함께 총재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했다.[11] 그는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보나파르트의 신임을 얻었고, 이후 프랑스 통령 정부에서 보나파르트에 반대하는 세력을 효과적으로 제압하며 파리와 지방 경찰의 중앙 집권화와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1]푸셰는 단검 음모 등 여러 사건에서 경찰 ''사주자''들을 활용하여 주요 "음모자"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처형했다.[11] 생니케즈 거리 음모 사건에서는 왕당파의 소행임을 밝혀냈으나, 나폴레옹의 자코뱅 탄압을 막지는 못했다.[11] 1802년 봄 ''격문 음모''에서는 자코뱅을 통령 정부의 보복으로부터 구한 것으로 알려졌다.[11]
같은 해 보나파르트가 종신 제1통령으로 선포된 후, 푸셰는 지나치게 많은 권력을 가졌다는 이유로 경찰장관 직책에서 해임되었다.[11] 경찰 부서는 폐지되고 업무 대부분은 확장된 법무부로 이관되었으나, 나폴레옹은 푸셰에게 원로원 의원직과 함께 상당한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
이후 푸셰는 프리메이슨으로 돌아가 멜룅의 "레 시토아인 르유니" 로지에 참석했고,[12] 캄바세레스의 도움으로 "그랑 로지 심볼리크 제네랄"의 보존자가 되어 제국 전역의 프리메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12] 원로원 의원으로서 간첩 활동을 지속하며 조르주 카두달-샤를 피슈그뤼 음모(1804년 2–3월) 당시 나폴레옹의 호의를 얻기 위해 경쟁했고, 앵기앵 공작 체포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11] 그는 훗날 앵기앵 공작 처형에 대해 "범죄보다 더 나쁜 실수였다"라고 평했다.[13]
제1 프랑스 제국 선포 후, 푸셰는 다시 경찰부 수장(1804년 7월)이 되었고, 내무부 장관까지 겸임하며 중요한 활동을 수행했다.[11] 그의 경찰 요원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1804년 이후 음모가 사라진 것은 나폴레옹과 푸셰가 불러일으킨 공포 때문이었다.[11]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이후, 푸셰는 "폐하, 아우스터리츠는 구 귀족을 붕괴시켰습니다. 생제르맹 교외는 더 이상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11]
1808년 스페인 원정 중이던 나폴레옹은 푸셰와 탈레랑의 회동, 조아생 뮈라와의 접촉 소식을 듣고 파리로 돌아왔으나, 푸셰를 고발할 증거는 찾지 못했다.[11] 그해 푸셰는 오트란토 공작 칭호를 받았다.[11]
1809년 오스트리아 원정 중 영국의 왈체렌 원정으로 앤트워프가 위협받자, 푸셰는 6만 명의 국민 방위군 동원 명령을 내리며 "나폴레옹의 천재성이 프랑스에 광채를 비출 수 있지만, 그의 존재가 우리로 하여금 적을 격퇴하는 데 필수적이지 않다는 것을 유럽에 증명합시다."라는 성명을 추가했다.[11]
같은 해 말, 푸셰는 나폴레옹의 평화 의지를 파악하고 스펜서 퍼시벌 영국 내각에 비밀리에 접근했다.[11] 나폴레옹은 이를 알고 분노하여 1810년 6월 3일 푸셰를 해임했다.[11] 푸셰는 로마 총독직을 받았으나, 중요 문서를 넘겨주지 않아 나폴레옹의 분노를 샀고, 피렌체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다 토스카나 엘리사 보나파르트의 중재로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했다.[14]
1812년 러시아 원정을 막으려다 실패한 푸셰는, 파리로 돌아온 나폴레옹에게 말레 쿠데타 연루 의심을 받았으나 결백을 입증하고 조언했다.[11] 그러나 나폴레옹은 그를 일리리아 지방 통치로 보냈고, 1813년 10월 독일의 나폴레옹 체제 붕괴 후에는 조아생 뮈라 감시를 위해 로마와 나폴리로 파견되었다.[11] 뮈라의 로마 침공으로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은 푸셰는 1814년 4월 10일, 나폴레옹 퇴위 시점에 파리에 도착했다.[11]
총재정부 시절부터 푸셰는 밀정을 고용한 비밀 경찰로 국가를 감시했고, 조제핀을 매수하여 나폴레옹의 사생활까지 감시했다.[21] 나폴레옹은 푸셰의 정보력을 높이 평가하여 비서관을 통해 그를 불렀는데, 이는 나폴레옹에게 각별한 배려였다.[22]
3. 2. 나폴레옹과의 갈등과 몰락
나폴레옹 1세 때 푸셰는 경찰장관으로서 정보를 장악하여 권력의 2인자로 군림하였다.[11] 푸셰는 시에예스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총재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에 가담했고,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를 추진하는 데 적극적으로 활동하여 나폴레옹의 신임을 얻었다.프랑스 통령 정부에서 푸셰는 나폴레옹에 반대하는 세력을 효율적으로 제압했다. 그는 파리와 지방 모두에서 경찰의 중앙 집권화와 효율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11] 푸셰는 종종 왕당파의 감사까지 받기도 하면서, 나폴레옹의 더욱 임의적인 행동을 조심스럽게 완화시켰다.
푸셰의 행동은 단검 음모에서도 능숙했다. 주요 "음모자"들은 쉽게 함정에 빠졌고, 생니케즈 거리 음모로 인해 보나파르트가 엄격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되면서 처형되었다. 이 음모는 푸셰에 의해 왕당파의 소행으로 밝혀졌으나, 나폴레옹이 주도한 주요 자코뱅의 탄압을 막지는 못했다.
다른 문제들에서 푸셰는 자코뱅을 통령 정부의 복수에서 구한 것으로 여겨졌고, 보나파르트는 부하로 삼기에는 너무 많은 권력을 가진 푸셰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802년 8월 1일, 보나파르트가 종신 제1통령으로 선포된 후 푸셰는 직책을 박탈당했다. 경찰 부서가 폐지되고 업무의 대부분이 확장된 법무부에 위임되었으나, 나폴레옹은 푸셰에게 원로원 의원으로서 연간 35,000 프랑의 수입과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게 하고, 경찰 예비 자금에서 백만 프랑 이상을 지급했다.
1802년 이후 푸셰는 프리메이슨으로 돌아가 활동하며 제국 전역의 프리메이슨에 대한 귀중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12]
푸셰는 원로원 의원이 되었고, 경찰 예비 자금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러나 그는 계속 음모를 꾸몄고, 조르주 카두달-샤를 피슈그뤼 음모 당시 나폴레옹의 호의를 얻기 위해 성공했으며, 앵기앵 공작의 체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푸셰는 앵기앵의 처형에 대해 "그것은 범죄보다 더 나빴다. 그것은 실수였다"라고 말했다.[13]
제1 프랑스 제국이 선포된 후, 푸셰는 다시 경찰부의 수장(1804년 7월)이 되었고, 나중에는 내무부를 맡아 중요한 활동을 수행했다. 그의 경찰 요원들은 어디에나 있었고, 나폴레옹과 푸셰가 불러일으킨 공포는 1804년 이후 음모가 없었던 이유의 일부를 설명한다. 아우스터리츠 전투 (1805년 12월) 이후, 푸셰는 "폐하, 아우스터리츠는 구 귀족을 붕괴시켰습니다. 생제르맹 교외는 더 이상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폴레옹은 푸셰에 대한 불신을 유지했다. 1808년 초, 스페인 원정 중 황제는 푸셰와 탈레랑이 파리에서 회동을 가졌고, 조아생 뮈라를 접촉했다는 소문을 듣고 즉시 파리로 돌아왔지만 푸셰를 고발할 만한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 해 푸셰는 오트란토 공작 칭호를 받았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 원정 중이던 1809년, 영국의 왈체렌 원정이 앤트워프의 안전을 위협하자 푸셰는 제국의 북부 ''프레페''에게 6만 명의 국민 방위군을 동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황제는 푸셰의 말에 대한 불만을 표명했지만, 조치에 대한 승인도 분명히 했다.
이후 몇 달 동안 황제와 장관 사이에 더 많은 마찰이 발생했다. 1809년 말 나폴레옹이 평화를 원한다는 것을 알고 푸셰는 스펜서 퍼시벌의 영국 내각에 비밀리에 접근했다. 나폴레옹은 협상을 시작했을 때 푸셰가 먼저 그를 가로막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1810년 6월 3일 그를 해임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푸셰에게 로마 ''데파르트망''의 총독직을 주었다. 떠나기 직전 푸셰는 나폴레옹에게 그의 전 부서의 일부 중요한 문서를 넘겨주지 않았고, 황제의 분노가 다시 타올랐다. 푸셰는 피렌체에 도착한 후 이 사실을 알고 미국으로 항해할 준비를 했다.
날씨와 심한 뱃멀미로 인해 항구로 돌아온 그는 토스카나의 엘리사 보나파르트 대공녀를 중재자로 삼아 엑상프로방스에 정착할 수 있었다.[14] 1812년 그는 러시아 침공 계획에서 나폴레옹을 막으려 했지만 실패했고, 그해 말 클로드 프랑수아 드 말레 음모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받았다.
푸셰는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황제에게 유용한 조언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여전히 불신하며 그에게 일리리아 지방의 통치를 맡기라고 명령했다. 독일의 나폴레옹 체제가 붕괴되자(1813년 10월), 푸셰는 로마로, 그 다음 나폴리로 파견되어 조아생 뮈라의 움직임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푸셰가 나폴리에 도착하기 전에 뮈라는 로마 영토를 침공했고, 이에 푸셰는 프랑스로 돌아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나폴레옹이 그의 원수들에 의해 퇴위를 강요받고 있던 1814년 4월 10일 파리에 도착했다.
이 위기에서 푸셰는 원로원 의원으로서 샤를 10세의 형제인 루이 18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 샤를에게 대표단을 보내 군주제와 국가 간의 화해를 모색하도록 조언했다. 그 후 그는 엘바 섬으로 추방된 나폴레옹에게 미국으로 철수하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보냈다. 새로운 군주인 루이 18세에게는 자유를 옹호하고 모든 이익을 화해시킬 조치를 채택할 것을 권고했다.
루이 18세의 반응이 만족스럽지 않자, 푸셰는 부르봉 왕가를 전복하려는 음모자들과 관계를 맺었다. 라파예트 후작과 루이 니콜라 다부가 이 문제에 연루되었지만, 푸셰와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행동하기를 거부하여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실각 후 망명 시절
루이 18세가 파리로 돌아온 후, 푸셰는 임시 정부 수반 지위를 탈레랑에게 빼앗겼다. 프랑스 왕정복고 이후 짧은 기간 동안 경찰 장관을 맡았지만, 왕당파는 국왕 살해범 푸셰를 잊지 않았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인 마리 테레즈는 푸셰가 나타나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결코 함께하지 않았다.[24] 1815년 8월, 푸셰는 장관 취임 후 불과 2개월 만에 실각하여 작센 왕국 주재 대사로 드레스덴에 좌천되었다.[24]
1816년 1월 9일, 파리 의회는 '''"백일천하 때 나폴레옹에게 가담한 국왕 사형 찬성 투표자는 프랑스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라는 푸셰를 겨냥한 결의를 했고, 이에 따라 푸셰는 국외로 추방되어 프라하로 망명했다.[24] 그 후 오스트리아의 린츠, 이탈리아를 전전하다 1820년에 트리에스테에서 사망했다. 만년에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한 생활을 영위했고, 사람이 바뀐 듯이 교회의 참배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푸셰는 죽을 때까지 적대자의 개인 정보를 손에 넣어 보신에 성공했다. 오트란토 공으로서의 거성 터전이 있는 센에마른주에 매장되어 있다.[25]
5. 유산과 평가
슈테판 츠바이크의 평전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은 푸셰에 대한 대표적인 평가로 꼽힌다. 츠바이크는 푸셰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족"이자 "도박의 모험을 즐기는 저돌적 정신의 인간"으로 묘사하며, 그의 비도덕성과 변절을 비판하는 동시에 백일천하 당시의 정치적 역량은 인정하는 양면적인 평가를 내렸다.[33][34][35]
푸셰는 ''루이 카페 재판에 대한 성찰''(1793), ''공교육에 대한 성찰''(1793), ''대학 관련 보고서 및 법률 초안''(1793), ''리옹 자치 코뮌 상황 보고서''(1794), ''사제 등에 관한 지사들에게 보내는 편지''(1801), ''웰링턴 공작에게 보내는 편지''(1817) 등 여러 정치적 소책자와 보고서를 저술했다.[19]
메이지 시대에 일본 경찰을 창설한 가와지 토시요시는 푸셰를 본받아 그의 사적을 도입했다.
츠바이크의 평전은 여러 번역본으로 출간되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저, 요시다 마사미 외 역, 『조제프 푸셰』, 미스즈 서방, 1969년 (신판 1998년, ISBN 978-4622046622)[27]
- 슈테판 츠바이크 저, 다카하시 테이지, 아키야마 히데오 역, 『조제프 푸셰: 한 정치인의 초상』, 이와나미 문고, 1979년 (개정판 2011년, ISBN 978-4003243749)
- 슈테판 츠바이크 저, 후쿠다 히로토시 역, 『조제프 푸셰』, 구텐베르크21 (전자책: 킨들판 외), 2022년 11월부터[28]
- 슈테판 츠바이크 저, 야마시타 하지메·야마시타 반리 역, 『조제프 푸셰: 한 정치인의 초상』, 주오코론 문고, 2024년 7월[29] (ISBN 978-4122075429)
5. 1. 긍정적 평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서 푸셰를 "도박의 모험을 즐기는 저돌적 정신의 인간"[34]이라고 평가했다. 츠바이크는 푸셰를 비판하면서도 백일천하 당시 보여준 역량에 대해서는 "몇 주 동안 푸셰는 고집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면서도 명료하게 정치를 해 나갔다. 세계 역사에서 외교활동 중 가장 완벽한 대목으로 간주될 정도이다."[35]라며 공정한 시선을 보냈다.5. 2. 부정적 평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평전 《조제프 푸셰.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에서 푸셰를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종족"이라며 "푸셰 같은 인물을 해부해볼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33] 츠바이크는 푸셰가 비도덕적인 변절자일 뿐만 아니라 "도박의 모험을 즐기는 저돌적 정신의 인간"[34]이라고 평가한다. 한마디로 프랑스 역사의 메피스토펠레스인 셈이다. 츠바이크는 푸셰를 가차없이 비판하면서도, 백일천하 당시 그가 보여준 역량에는 공정한 시선을 던진다. "이 몇 주 동안 푸셰는 고집스러우면서도 신중하게, 다의적 해석이 가능하면서도 명료하게 정치를 해 나갔다. 세계 역사에서의 외교활동 중 가장 완벽한 대목으로 간주될 정도이다."[35]6. 가족 관계
Bonne Jeanne Coiquaud|본 잔 콰이코프랑스어(1763년 4월 1일 ~ 1812년 10월 8일)와 1792년 9월에 결혼하여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다.[16][17]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니에브르 푸셰 도트란트 (Nièvre Fouché d'Otrante) | 1793년 8월 10일 | 1794년 8월 | |
조제프 리베르테 푸셰 도트란트 (Joseph Liberté Fouché d'Otrante) | 1796년 7월 22일 | 1862년 12월 31일 | 제2대 오트란토 공작, 1824년 포르튀네 콜린 드 쉬시와 결혼, 얼마 지나지 않아 자녀 없이 별거. |
에갈리테 푸셰 도트란트 (Égalité Fouché d'Otrante) | 1798년 | 사산 | |
프라테르니테 푸셰 도트란트 (Fraternité Fouché d'Otrante) | 1799년 | 사산 | |
Armand François Cyriac Fouché d'Otrante|아르망 프랑수아 시리아크 푸셰 도트란트sv | 1800년 3월 25일 | 1878년 11월 26일 | 제3대 오트란토 공작, 미혼, 자녀 없음. |
Paul Athanase Fouché d'Otrante|폴 아타나스 푸셰 도트란트sv | 1801년 6월 25일 | 1886년 2월 10일 | 제4대 오트란토 공작, 이후 스웨덴으로 이주하여 두 번 결혼했고, 스웨덴에 남은 자녀를 두었다. |
조제핀 뤼드밀 푸셰 도트란트 (Joséphine Ludmille Fouché d'Otrante) | 1803년 6월 29일 | 1893년 12월 30일 | 아돌프 드 라 바르트 드 테름 백작(Adolphe Comte de La Barthe de Thermes, 1789년 ~ 1869년)과 결혼하여 자녀(아들 폴, 딸 이자벨)를 두었다. |
에르네스틴 드 카스텔란-마자스트르(Ernestine de Castellane-Majastres, 1788년 7월 5일 ~ 1850년 5월 4일)와 두 번째 결혼에서는 자녀가 없었다.
7. 대중문화
- 슈테판 츠바이크는 "조제프 푸셰"라는 제목의 전기를 썼다. 츠바이크는 푸셰가 혁명에서 군주제로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방법을 심리학적 접근 방식으로 풀어냈다.[18]
- 장 클로드 브리스빌의 연극 "악마와 함께 저녁 식사"에서 푸셰는 탈레랑과 함께 식사하며 정권에서 각자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 드라마는 에두아르 몰리나로 감독, 클로드 리치와 클로드 브라소 주연의 1992년 영화 "만찬"으로 제작되었다.
- 조지프 콘래드는 1924년 단편 소설 "결투"에서 푸셰를 묘사했으며, 이는 1977년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영화 "결투사"로 만들어졌다. 영화에서 푸셰는 앨버트 피니가 연기했다.
- 데니스 휘틀리의 역사 소설 로저 브룩 시리즈에 푸셰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 한 살인자의 이야기" 첫 페이지에서 푸셰는 '재능 있는 혐오'로 언급된다.
- 에드워드 그리슨의 소설 "바람의 질주"에서 푸셰는 1804년 나폴레옹 암살을 위한 카두달 음모와 관련하여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로렌스 더렐의 "알렉산드리아 4중주" 중 "마운트올리브"(1958)에서 한 프랑스 외교관은 이집트 내무부 장관 멤리크 파샤를 "현대 역사상 최고의 내무부 장관"이라 칭찬하며 푸셰와 비교한다. 멤리크는 이 비교에 감명받아 푸셰의 흉상을 주문하기도 한다.
- 버나드 콘웰의 소설 "샤프의 적"에서 푸셰는 프랑스 스파이 마스터 피에르 듀코스의 멘토로 언급된다.
- 닥터 후 소설 "월드 게임"에 테렌스 딕스에 의해 푸셰가 등장한다.
- 윈스턴 그레이엄의 소설 "뒤틀린 칼"에 푸셰가 등장한다.
- 존 딕슨 카의 소설 "캡틴 컷스로트"는 푸셰가 다양한 음모를 꾸미는 모습을 묘사한다.
- 키스 레이들러의 "카톤 연대기: 플래시먼의 진짜 아버지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2010)에서 푸셰는 중요한 인물이다.
- 프랑스 배우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미니시리즈 "나폴레옹"에서 푸셰를 연기했다.
- 1987년 미니시리즈 "나폴레옹과 조세핀: 러브 스토리"에서 배우 스티븐 젠이 푸셰를 연기했다.
- 할리우드 역사 드라마 "공포의 통치"(1949)에서 푸셰는 아놀드 모스가 연기했다.
- 로버트 윌턴의 소설 "배신의 조류"에 푸셰가 등장한다.
- BBC의 전쟁과 평화 (1972년 TV 시리즈) 11화 "운명의 사람들"에서 푸셰는 모리스 페리가 연기했다.
- 프리드리히 레크-말레체벤의 "절망에 빠진 남자의 일기"에서 푸셰가 언급된다.
- "권력의 48가지 법칙"은 푸셰를 법칙 35번(타이밍의 기술을 습득하라)의 예시로 인용한다.
- 테레사 그랜트의 파리 사건에 푸셰가 등장한다.
- 알렉상드르 뒤마 소설 생트-에르민 기사에서 푸셰는 주인공의 모험을 후원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 쓰지 쿠니오 『푸셰 혁명력』
- 쿠라타 에미 『조용히, 천재 지금 공부 중!』
- 하세가와 테츠야 『나폴레옹 - 사자의 시대 -』
- 이케다 리요코 『영광의 나폴레옹-에로이카』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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